나는 나의 삶을 디자인한다

먼지 쌓인 일기장에서 만난 스무 살의 나

Open diary with handwritten Korean text, vintage family photos, camera, ink bottle, and dried flowers on wood table

인생 스튜디오를 만들기 위해 서재 깊숙한 곳을 정리하던 중, 낡고 빛바랜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쿰쿰한 종이 냄새와 함께 수십 년 전의 시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대학 시절의 일기장과 테두리가 누렇게 변한 사진첩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리를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아 그 시절의 기록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습니다. 흑백에 가까운 컬러 사진 속에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지금의 태양보다 더 뜨겁게 반짝이던 스무 살의 제가 서 있었습니다.

1. 잊고 지냈던 ‘나’라는 사람의 원형

사진첩을 넘기다 멈춘 곳은 어느 여행지의 이름 모를 들판이었습니다. 그 사진 뒤에는 서툰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세상을 다 담을 수는 없어도, 내가 선 곳의 풍경만큼은 가장 나다운 색으로 칠하며 살고 싶다. 남이 그려놓은 지도 위를 걷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내는 탐험가가 되기를.”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회사가 그려준 지도 위를 충실히 걸었고, 사회가 정해준 성공의 속도에 맞추느라 숨 가쁘게 뛰어왔습니다. 저는 꽤 유능한 ‘지도 위의 보행자’였을지는 모르나, 스무 살의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나만의 풍경을 칠하는 탐험가’는 아니었습니다.

2.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오래된 약속

잉크가 번진 일기장 속에는 제가 좋아했던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의 흙냄새가 좋다”, “언젠가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글을 쓰고 싶다.”

직장 생활이라는 치열한 파도에 휩쓸려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 줄 알았던 저의 취향과 꿈들이, 그 낡은 종이 속에는 박제된 나비처럼 고스란히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아침마다 서툰 스케치를 하고, 이토록 정성스럽게 글을 쓰고 있는 이 모든 행위가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청춘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보내온 ‘삶의 설계도’였습니다.

3. 은퇴, 드디어 그 아이를 다시 만나는 시간

사람들은 은퇴를 하면 ‘상실감’이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 정기적인 수입, 소속감… 물론 그런 것들이 사라진 자리는 처음엔 시리고 허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낡은 일기장을 덮으며 저는 확신했습니다.

은퇴는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삶의 소음 때문에 잠시 떼어놓았던 ‘진짜 나’와 다시 만나는 약속의 시간이라는 것을요. 사진 속 스무 살의 아이는 원망 섞인 눈으로 저를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드디어 우리만의 지도를 그릴 시간이 왔네!”라고 환하게 웃으며 저를 응원해주고 있었습니다.

4. 청춘의 설계도 위에 오늘의 색을 입히다

저는 오늘, 이 낡은 일기장을 제 ‘인생 스튜디오’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기로 했습니다. 스무 살의 제가 꿈꿨던 그 탐험가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눈가는 조금 침침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때보다 훨씬 깊고 따뜻해졌습니다. 이제 저는 그 시절 미처 그리지 못했던 설계도의 나머지 부분들을 하나씩 채워나가려 합니다. 타인이 정해준 ‘정년’이라는 선에 갇히지 않고, 제가 직접 긋는 새로운 선들로 제 삶의 영토를 넓혀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자 속에는 어떤 꿈이 잠들어 있나요?

가끔은 집안의 묵은 짐을 정리하듯,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둔 ‘청춘의 상자’를 열어보시길 권합니다. 그곳엔 당신이 세상에 내놓지 못한 채 숨겨두었던 보석 같은 설계도들이 반드시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나의 빛나는 삶은 내가 디자인한다.”
이 말은 오만한 다짐이 아닙니다. 나를 믿고 기다려준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가장 정중하고 뜨거운 대답입니다.

오늘 밤, 저는 사진 속의 그 아이와 함께 기분 좋은 맥주 한 잔을 나누며 속삭여주려 합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제 정말 우리가 꿈꿨던 그 삶을 멋지게 디자인해 볼게.”

“여러분은 스무 살의 자신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Life Ateliers]의 라이프 디자인 노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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