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삶을 디자인한다

가방 속 스케치북을 메고 떠난 하루: 세상이라는 캔버스를 마주하다

Sketchbook on bench showing pencil drawing of a tree and path, with pencil and travel mug nearby

아침 식탁 위에서 작은 찻잔을 그리던 며칠이 지나자, 문득 이 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등산복’을 챙겨 입고 속도를 내어 산을 올랐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릅니다. 가벼운 가방 안에 스케치북과 펜 한 자루, 그리고 따뜻한 차가 담긴 보틀 하나를 넣고 느릿한 걸음을 떼어 보았습니다.

오늘 제 디자인의 목적지는 거창한 명소가 아닙니다. 늘 앞만 보고 지나치느라 그늘의 모양조차 몰랐던 동네 작은 공원의 낡은 벤치입니다.

1. 멈춰 서니 비로소 들리는 풍경의 숨소리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니, 평소에는 소음으로만 들리던 것들이 각자의 선율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부비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까지.

저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펼쳤습니다. 오늘 제가 담고 싶었던 것은 공원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였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견뎠을 나무의 줄기를 펜 끝으로 따라가 보았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껍질의 질감을 선으로 옮기다 보니, 문득 이 나무의 주름이 마치 제 손등의 주름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습니다.

2. “참 보기 좋네요” — 뜻밖의 선물 같은 한마디

한참 나무의 곡선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옆을 지나가던 한 어르신이 걸음을 멈추고 제 스케치북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나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참 보기 좋네요. 무언가를 저렇게 뚫어지게 바라본 게 언제였나 싶어.”

그 한마디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어르신과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분의 미소 속에는 부러움과 응원이 섞여 있었습니다. 평생 누군가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바쁘게’만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큰 사치이자 축복인지를 그 짧은 순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줄 알았던 은퇴 후의 삶이, 스케치북 하나를 매개로 다시 세상과 따뜻하게 연결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3. 나를 위한 삶은 ‘프레임’을 정하는 것부터

그림을 그리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종이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다 담을 수는 없다는 것을요. 내가 그리고 싶은 핵심을 정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생략하거나 배경으로 흘려보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됩니다.

우리의 인생 2막도 이와 참 닮았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시키는 모든 숙제를 다 해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이라는 스케치북에 무엇을 중심에 둘지, 무엇을 여백으로 남길지 결정하는 권한이 오롯이 저에게 있음을 느낍니다.

“나의 삶은 내가 디자인한다”는 말은, 결국 내 소중한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할지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이었음을, 공원의 차가운 벤치 위에서 뜨겁게 깨달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엔 빛이 차올랐습니다

스케치북에는 비뚤비뚤한 나무 한 그루가 남았지만, 제 마음속에는 그보다 훨씬 커다란 풍경이 담겼습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길가의 작은 풀꽃이 보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은퇴 후의 삶은 빛이 바래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밝아 보지 못했던 세상의 세밀한 빛깔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내 삶의 캔버스에 가장 나다운 색으로 덧칠해가는 과정입니다.

혹시 지금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쓸쓸함에 마음이 흔들리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아주 작은 종이와 펜 하나만 들고 밖으로 나가보세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한 모습으로 당신의 선(Line)이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은 나만의 ‘느티나무’가 있나요?”

[Life Ateliers]의 라이프 디자인 노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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